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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國의 앞날을 생각하며.....제13신
이름 : 金永昭   작성일 : 19/03/01   조회수 : 790

안녕하십니까?

아래 글은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본부장과 김병관 장군 간의 5.18에 관한 서로 상반된 의견을 주고받은 내용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 김병관 장군과 서정갑 본부장의 서신 >

 (1) 김병관 장군의 글

서 선배님!

정국의 불투명한, 그리고 암울한 전개 속에서 장렬하게 싸워주고 계시는 선배님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러나 본 이메일의 내용은 선배님 말씀이 100% 오류임을 감히, 그리고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군사적 전문성 면에서 선배님은 전투부대 전문가로서는 많이 부족 하시지 않습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뭘 얼마나 더 아신다고 이런 글을 마구 올리십니까? 잘 모르신다는 점을 깨달으신다면 좀 더 얌전하게 의문 정도만 제기 하셔여지요. 그랬다면 본 후배도 이렇게까지 항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투입된 북괴군 수는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대강 600여명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제발 너무 나서지 마시기를 당부 드리며, 본 시국에 찬물을 끼얹지 마시기를 거듭 당부드립니다. 자꾸 이러하시기에 많은 후배들이 선배님의 입장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곤 하더군요.

 

조갑제 대기자님도 선배님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더군요. 비상계엄의 삼엄한 경비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침투가 가능하냐고 하면서요...참으로 우스운 시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실상을 한번만 간단히 생각해봐도 그 말은 틀린 것임을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정치 상황에 대비하려는 것이기에 많은 병력을 차출하여 도심지의 시위현장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정의 침투나 공격에 대비한 병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관심도 소홀해져 적이 침투 및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형성한답니다.

 

선배님의 능력과 그간의 공적을 존경해온 후배 김병관 장군 올림.

 

그리고 북한은 이미 그 직전의 야당 측 거사계획(대규모 시위로 시국을 동요시켜 정치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한다)을 이미 득문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이 그러한 대범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더 말씀 드릴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당시의 모든 정치적 군사적 국면과 518 사태간의 진압작전을 통제 절차와 경과를 보아도 매우 잘 훈련된 부대가 무자비하게 수행한 작전임이 명백합니다.

 

제발 현 정국에서 이적성 발언과 논쟁을 자제해주실 것을 간청하며, 항의하는 동시에경고를 드립니다. 이런 걸 밝히시려면 예전에 하셨거나, 아니면 나중에 평안해진 후에 재개해주시길 간청합니다.

 

선배님에 대한 평가가 적군이 아닌가 할 정도로 후배들의 혐오감이 증폭되지 않도록 자제해주실 것을 간청 드립니다. 더 이상 이러시면 선배님은 의심과 의혹의 대상이 됨을 자초하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On Thu, Feb 7, 2019 wrote:Byungkwan Kim

 

(2) 서정갑 본부장의 답글

 김병관 장군

 제번하옵고, 김 장군은 5.18 계엄령 당시 어디서 근무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육본 계엄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전투병과가 아니라고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나는 육군대학 정규 22기 과정을 졸업, 육군대학 행정처장, 육군기록정보관리단장으로 재임하면서 전후방 사단, 작계 5027을 모두 관리한 사람으로서 당신보다도 작전계획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반면 지만원 씨는 전투병과지만 월남에서 대위 달고 포대장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대대장, 연대장, 포 사령관 등 주요 지휘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황당무계한 광주사태 600명 북괴군 침투설은 대한민국 국군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북괴군은 신출귀몰, 80년의 국군은 바보였단 말인가?라고 성명서를 냈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4성 장군이라고 존경했더니 선배라고 하면서 이적성 발언과 논쟁을 자제하라는 막말을 지껄여야 하겠습니까? 무엇이 이적인지 이적에 대한 개념도 모르니 향군회장에서 탈락한 것 아닙니까?

 

4성 장군 대접 받으려면 앞으로 언행을 조심 하세요! 저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이종구 장관님, 이충석 (21) 장군께 알아보세요!

 

2019. 2. 11. 예비역 대령 서 정 갑 (82) 010-5233-5722

 

*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성명서 (2019. 2.1)

황당무계한 '광주사태 600명 북괴군 침투설'은 대한민국 國軍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북괴군은 신출귀몰, 1980년의 국군은 바보였단 말인가?

 

북한의 광주 사태 남파요원으로 지목된 탈북자 황장엽 선생은 당시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강철환(조선일보 기자)요덕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고, 김정아(북한인권단체 통일맘연합회대표)4, 장진성(탈북시인)6, 박상학(북한인권 운동가)9살이었다.

 

‘5·18 광주사태당시 계엄령이 떨어진 광주에 ‘600명의 북괴군이 침투했고, 이들 북괴군을 國軍이 사살했다면 그 치적은 대한민국 국방사(國防史)에 길이 남을 최고의 자랑거리가 됐을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국군 보병 제20사단, 공수부대 등이 시위대 진압에 투입됐는데, 육본(陸本)에 보관 중인 ‘5.18전투상보등 그 어디에도 북괴군과 교전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5·18 국회공청회, 문서검증, 취재기자 증언 등 그 어디에도 북괴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2013년 김관진 장관의 국방부는 '여러 보고서 등을 면밀히 검토 하였으나,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미국의 CIA20171월 홈페이지에 공개한 기밀해제(광주사태 관련내용 언급) 문서를 통해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하는 기미가 없다고 적시했다. 당시 CIA김일성이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한국 안보를 책임졌던 유병현 합참의장도 북한군 침투설을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했다.

 

사실이 이런데도 광주사태 당시 600명의 북괴군이 침투했다는 주장은 당시 전후방 각지에서 祖國수호에 여념이 없었던 국군장병들의 수고와 명예를 모독(冒瀆)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 등 일부 정치인들이 황장엽 선생을 비롯하여 탈북자 출신의 북한인권운동가 김성민·강철환·박상학·장진성 씨 등을 광주사태 당시 남파됐다고 주장했던 지만원 씨를 최근 ‘5·18진상조사위원으로 추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는 愛國세력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분열시키는 행동이다.

 

만약 북괴특수군 600명이 침투한 것이 사실이라면, 북괴군을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한 군대로 고무 찬양하는 것이며, 우리 국군을 폄훼한 것으로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명언에 따라 당시 지휘관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단 말이 아닌가? '종북 괴물'과 싸우다가 같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자!

 

대한민국 만세 ! 국군 만세 ! 자유통일 만세 !

 

* 김병관 장군의 글...(1)

 

서정갑 회장님과 국민행동본부는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고 있다.

확실한 수사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항을 서둘러 발표하여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려 하지 말기를 바란다.

 

518 계엄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그에 대한 의견을 내는 것은 각 개인이나 단체의 권리이다. 그러나 광주에 북괴군 특수부대 등이 투입되어 정치적 군사적 사건으로 확대시키고, 수많은 인명 피해까지 내어 매우 중대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명백한 조사와 수사를 확실히 완결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정치적 결론을 내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매우큰 수렁을 형성하고 있다.

 

이제라도 확실한 조사로 나아가야 할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서정갑 회장과, 회장의 주도하의 국민행동본부는 현 상태에서 스스로 내린 의견수준의 내용을 조사 완료된 결론인양 발표하면서 오도 및 은폐를 기도한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확신을 한다면 굳이 정확한 조사와 수사를 거부할 이유가 무엇인지 서정갑 회장은 밝혀야 할 것이다.

 

부탁하건데, 더 이상 주장을 하여 정치적 영향을 주려하지 말고, 의견발표 정도로 그쳐야 한다,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여론이 팽배함에도 불구하고 종결 된 듯이 주장하면서 공론화하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불순한 행위임으로 더 이상 진척시키지 말아야 한다.

 

* 또 다른 김병관 장군의 글...(2)

 

선배님께서 저를 잘못 보셨군요.

선배님께서 제가 지적한 점을 인정만 하셨다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선배님께서 자유민주주의화를 위해 올바른 입장을 주장해 오신 점을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선배님께서 저를 자극하려고 향군회장에 떨어진 점까지 거론하셨군요. 급하셨던 것 같군요. , 저는 겨우 6표밖에 얻지 못했지요. 챙피하진 않습니다. 저는 매표를 위한 금액은 일체 쓰지 않고 정도만을 행하다가 그리 되었지요.

 

그래도 저는 양심과 애국심을 가진 분이 최소한 여섯 분은 있다는 점에 감사했었지요.

 

저는 일생동안 병법과 전쟁사 연구, 교리연구, 교리발전 제안, 무기체계연구에 전념해온 사람입니다.

 

제가 육군대학 담임교관시절(2)간의 제자들이나, 육대교수부장(2) 간 제 지도를 받던 교관들이나,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연합사 지상구성군사령관 시절의 제 부하였던 사람들에게 제가 어떤 획기적인 실제 성과를 낳았던지, 제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확인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단순히 공부만 한 사람인지 현실적 유효성에 얼마나 역점을 두고 있었는지,

 

전투, 전술, 작전술, 전략에 대해 제가 어떤 강의들을 해왔는지, 전사연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며 기존 교리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전술과 대부대전술전략을 어떻게 왜 바꾸어야 하는지 제안하고 설득하였고, 얼마나 개선 발전 방향을 연구하고 제안하고 가르쳐왔는지, 그것을 실제 전술훈련 상황과 대부대 연습상황에 적용하여 종전의 연습상황, 워 게임 상황, 실기동훈련 적용 등에서 획기적인 결과들을 어떻게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는지를 들어보십시오. 곧 바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제 자랑을 하고 싶지는 않이 이만 적겠습니다. 제 말이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님을 느끼시게 할 필요가 있어서 적어보았습니다.

 

저는 518 당시에는 육사에서 역사 강의를 하던 시기였지요. 10. 26 사건과 12.12 사태, 그리고 518 사건을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겪었기에 격변의 시기에 대한 역사의 산 증인 중 한 사람입니다.

 

12. 12 사태 후 새로운 선거가 예견되던 시기에 가장 상황이 불리하던 측(?)이 모종의 사태를 획책하는 과정에서 정치인들 간에 모종의 모의가 이뤄지고, 이를 인지한 김일성이 이를 활용하기 위해 야심적인 계획을 결심하게 되였으며, 북한의 이런 사장은 알지 못한 채 당시 신군부 측은 517(?)

 

 

국내의 모의를 파악하고 전격적인 주요 인사 구속과 동시에, 소요 모의를 진압코자 수도권 일대를 집중적으로 단속하고자 각 대학을 점령하였습니다.

 

저는 그 날 고대 연대 서울대 부근을 가보게 되었는데 학생들이 고초를 겪고 있음을 보기도 했습니다.

 

다른 지역들은 모두 잠잠해졌으나, 그중에 전남대(? 기억이 모호)에서 가장 강한 반발이 있었던 것이고요, 피투성이 피해자들을 시위대가 들고 순회하자 이를 목격한 시민들의 봉기가 급속히 확산되었고 그 즈음에 사전에 준비된 고첩들과 그 직전에 침투하여 야산이나 민가 등에 대기 중이던 북한 특수요원들이 개입하여 사태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이 확대됩니다.

 

그런 확대에 겁을 먹는 시민들의 회피 반응도 있었지만 이들 특작부대(민간인복장 등 편의복)가 시민들을 동원하고 위협까지 하면서 독려하자 사태가 폭발적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기고 습격과 시민들에게 무기분배 및 사용 독려, 방산업체 습격과 장갑차/군트럭 탈취 운용, 교도소 습격(특전사 대대가 투입되어 필사적으로 방어했음. 따라서 매우 정예한 특작부대도 100여명 이상 사망. 그 시체들은 그 부근에서 처리 또는 들것에 실려서 이동 후 야산에 매몰) 등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 후 한국군 지휘부가 전교사에 형성되고, 전체적인 지휘는 특전사에 설치된 상황이었으며, 이들 지휘부는 사건 처리 과정에서 파악되는 적의 동정과 특성을 점차로 파악하게 됨. 특전사 정예부대의 공격을 교묘히 피해 사라지는 그 정예함과 기묘함 등을 알게 되었고 고도로 훈련된 북한 정예부대가 틀림없다는 점 등을 인식하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사태진압 후에 북한 개입여부를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 조치인데 생략된 이유를 모르겠음. 이러한 조사의 생략과 그 후의 과도한 518찬양, 군부에 뒤집어씌우기, 518유공자의 비정상적 확대, 지나친 우대(국제적으로도 이상한 점으로 평가됨) 등이 크다란 문제점을 야기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적 특작부대에 대한 지령과 결과보고 등이 미국의 무선 감청에 포착되었을 것이므로 미국은 이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보유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미국이 급히 항모전단들을 파견하고, 북한에 더 이상 확대 시 개입 경고 등으로 인해 전국적 확대가 방지됨. 김일성도 더 이상 확대시키고 싶었겠지만 미국의 강경한 경고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문제가 정치 이슈화되고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위기에 빠진다면 미국이 정보의 일부를 추가적으로 공개할 수도 있다고 예상됩니다.]

 

그리고 이 광주사태가 북한방송에서는 빈번히 보도되고 있었던 점, 국방부에서 공개하지도 않은 미국 항모전단의 한국 방향 이동 사실이 광주에 벽보로 붙어 있던 점 등은 북한 당국과 광주일대 파견 간첩들간에 정보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여인들의 시신에서 유방을 도려내는 장면도 방영되었는데 이는 북한에서 제작된 영상을 방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시체 절단은 수술용 메스 수준의 칼이어야만 가능하고, 폭도들이나 진압군이 가진 대검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시민들을 분개시켜 반정부노력에 동참시키려는 기도였다고 보입니다.]

 

 

사태진압 직후에 북한 개입여부를 조사했더라면 분명히 밝혀졌을 터인데, 왜 더 이상의 조사를 중지해버린 것인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조사 시기를 놓친 때문에 당시 신군부의 지도자들 상당수와 진압군 장병들이 대민 잔혹혐의로 고초를 당하고, 적성 반란 성격의 모습임을 결론내리지 않았기에 모든 평가가 뒤집어져버린 결과와 그로 인한 엄청난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사는 정확히 파악되어 기술되어야만 후일의 국가기강과 정론이 우뚝 설 수 있는 것인데 그 점이 뒤집어져버린 점이 가슴 아픕니다. 더 이상 할 얘기도 많지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선배님, 제발 몇 가닥의 추리를 통한 지식을 근거로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은 불가능하다는 낭설은 중지해주시기를 간곡히 건의 드립니다.

 

역사 평가를 방해한 죄인이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후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허심탄회한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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